잠 안 오는 김에 헛소리

스스로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나도 정신과 진료를 권하기는 하는데, 사실 난 그닥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.

의사 선생은 프로 근성+갑의 멘탈을 갖춘 단단한 사람이라, 우는 소리를 하는 환자를 하루에도 한 다스씩 만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. 그 양반은 항상 내 이야기를 성실한 태도로 들어주었다. 음. 부러웠다. 나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나약해서, 바위처럼 단단하게 살아내는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났다.

그래서 내가 의사 선생을 만나면 또 열등감이 증폭되어 견딜 수 없었던 거다. 나도 열심히 살았는데! 당신은 젊은 나이에 박사고! 이렇게 좋은 병원의 오너고! 석 달에 한 편씩 논문 공간하고! 내가 한 달에 백여 시간을 일하고 생계를 걱정하며 절망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우는 동안 그건 No.0235나 No.3687 쯤으로 인덱스가 붙여져 자료로 쓰이겠지!라는 생각을 하면 분하고 억울해서 더 앉아 있기가 힘이 들었다. 왜! 나도 열심히 살았는데!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, 내 선택이 대체 어디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었냐고.

그날 약을 받아 병원 문을 나서다가 모교의 세련미 넘치는 심볼(ㅋ)이 의기양양하게 박혀 있는 걸 보고 숨이 턱 막혀서, 진료실도 아니고 로비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다. 넌 능력있어서, 좋겠다 시발,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었는데, 저명한 학술지에 근사한 논문 내면서 내 이름 밑에 모교 이름 달아주고 싶었는데.

[4월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무슨 컨퍼런스 참가 관계로 휴진합니다]라는 안내문을 본 게 마지막이고 다시는 그 병원에도 다른 정신과에도 가지 않았다. 어쨌든 내 주제넘는 욕망과 주제도 모르는 분노에 대한 허튼 소릴 비웃지 않고 들어줘서 고맙단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결국 그것도 하지 못했다. 하지만 어차피 기억도 하지 못하겠지. 뭐 어떠랴.


1 2 3 4 5 6 7 8 9 10 다음


트위터